다음날 산드라는 곧바로 오르바를 찾았다.
우선 어제의 일을 직접 사과하게 하고 장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따져 봐야 한다.
전교생이 지나다니는 이 곳에서 기다리면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덧붙여 오늘의 산드라는 머리를 땋아 올려, 옆머리를 조금 남겨 감았다. 세로 롤은 양보할 수 없다. 특히 오늘처럼 기합을 넣어야 하는 날에는.
스쳐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기다리고 있자, 저쪽에서 화려한 집단이 몰려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속에서 유달리 키가 큰 자신의 약혼자를 발견하고 산드라는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그때 산드라의 귀에 그 거슬리는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는 정말 재밌었어요! 괜찮다면 또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다름 아닌 수습 성녀 아이니다.
목소리가 높아서 그런지 잘도 울린다. 스며들듯 귀에 닿는 세라피나의 목소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 저 여자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어제……?’
아이니의 말에 에릭과 오르바가 대답했다. 즉, 이 두 사람과 아이니가 어제 함께 있던 것이다.
산드라는 심호흡을 하고, 무례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왕자 전하의 앞길을 가로막듯 나섰다.
“산드라 님?”
아이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산드라는 우선 에릭에게 예를 표했다.
“실례합니다, 전하.”
“아, 산드라구나.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이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만, 어제는 어딘가에 나가신 건가요?”
산드라의 질문에 오르바가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에릭이 아닌 아이니가 잘 물어봤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 맞아요! 에릭 님이 거리를 안내해 달라고 하셔서, 저와 에릭 님과 오르바 님 세 명이서 다녀왔어요! 재밌었죠, 오르바 님!”
“그, 그래…….”
오르바는 산드라의 시선은 피하며 아이니 쪽만 바라보고, 아이니도 그게 기쁜 듯한 기색을 보이며 자신의 머리에 달린 머리 장식을 만졌다.
“이거, 그때 오르바 님이 사 주셨어요! 다정한 약혼자라서 좋겠네요, 산드라 님!”
그리고 아이니는 에릭에게 시선을 돌려 소매를 잡았다.
“다음에 또 가요, 에릭 님!”
“그래.”
분명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원 안에 퍼질 것이다.
수습 성녀는 왕세자 전하와 자작 영식과 거리에 놀러가는 사이라고.
마찬가지로, 산드라가 같은 날 약혼자 동반의 가든 파티에 갈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애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왕세자가 권유했다는 것도 있어, 그 자리에서 오르바를 탓할 수 없던 산드라는 나중에 오르바만을 불러냈다.
“무슨 생각이죠?”
“무슨 생각이고 뭐고, 성녀와 전하를 둘이서만 나가게 할 수는 없잖아. 호위다, 호위.”
한편 오르바는 생각을 고칠 시간을 얻었는지, 당당한 태도다.
“호위라면 본직 기사분이 계실 터예요. 그리고 이 일은 사전에 알고 계셨죠? 그런데 왜 제게 어떠한 설명도 사과도 없었나요?”
약속을 무시당한 데다가, 다른 여자와 놀러갔다는 소문은 하루 만에 학원에 전부 퍼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게 무슨 굴욕이냐며 산드라는 이를 갈았다.
“말하면 무조건 그렇게 반대했을 거잖아.”
“당연하죠. 애초에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라도 문제예요. 약혼자와 있는 남성 두 명과 외출하다니, 행실이 나쁜 여성이나 하는 일입니다.”
귀족은 여성의 품행에 특히 엄격하다.
성녀는 피를 남기는 의미에서 혼인은 허용되지만, 고위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취급인데다가 교회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더욱 엄격할 것이다. 성녀 자신의 평판도 떨어질 테고, 무엇보다 학원 내에서 그런 행동을 계속하면 그녀의 결혼 상대는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아, 큰 한숨 소리가 들리자 산드라는 귀를 의심했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쪽도, 내쉬어야 마땅한 입장도 산드라 쪽이다.
“잘도 그렇게 악담을 계속해서 주절댈 수 있군.”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띤 오르바의 말에, 즉석에서 대꾸했다.
“악담이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만약 지금 아이니 양을 데려 온다면 본인에게도 같은 말을 할 겁니다.”
“웃기지 마! 네 그 욕설을 순진한 아이니가 듣게 할 리 없잖아!”
욕설 따위는 하지 않았다. 산드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스르륵 산드라의 머리 장식에 시선을 준 오르바가 말을 이었다.
“아이니는 너와 달리 순진하고 섬세한 아이다. 그렇게 비싼 물건으로 꾸미지도 않고, 길가 노점에서 산 머리 장식만으로도 기뻐해 줘. 너처럼 생각하지 마.”
산드라는 너무나 기가 막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떠나는 오르바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르바가 아이니에게 선물했다는 머리 장식은 공교롭게도 오늘 산드라가 착용한 바렛과 같은 하얀 꽃이었다. 산드라가 착용하고 있는 것은 흰 꽃을 여러 개 겹쳐 놓아 입체적인 바렛으로, 여기저기에 작은 페리도트가 박혀 있다. 길가 노점에서 산 머리 장식과는 격이 다르다.
그걸 지금, 폄하당했어?
산드라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에메랄드 브로치를 꺼냈다.
“저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 * *
거리에 나간 것이 왕세자가 제안한 일이라면 세라피나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지만, 그녀는 신경 쓴 내색 없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수습 성녀의 언행에 감화되는 사람이 많아지자 학원의 풍기가 문란해지고 이곳저곳에서 약혼자끼리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절대 여왕인 세라피나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를 얕보는 목소리가 산드라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급기야는 교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성녀를 제 2비로 하자는 어리석은 의견도 들려 오고,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영애들이 “성녀와 왕세자야말로 진실한 사랑이다”는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시작했다.
우습지도 않다. 머릿속에 솜이라도 가득 차 있는 듯한 여자가 왕비가 될 수 있겠나.
하지만 산드라 자신도 조금은, 방관하는 세라피나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급변했다.
“그리고 사랑이라면,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왕비는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그 이상으로 무엇이 필요합니까.”
세라피나는 몸소 처들어 온 무례한 수습 성녀에 대해 의연하게, 고결하게, 청렴하게 격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처음부터 상대 따위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라피나가 원하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 그리고 그것은 왕세자인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학원의 로맨스와도, 파벌 싸움과도 다른 차원에 있었다.
응석부리는 성녀의 호소를 단호히 억누르고, 에릭과의 양호한 관계도 보여 준 세라피나에게 반발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 누가 미래의 왕비를 부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산드라도 깊이 감명 받았다.
“어쩜…… 어쩜 이리 고결한 분이신가요……!”
세라피나의 왕비로서의 소질은 처음부터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위를 걷는 존재였다.
성녀의 돌격을 받은 베르나데타와 함께 온실을 떠나며, 산드라는 깨끗이 정리한 손톱을 움켜쥐고 선언했다.
“베르나데타 님……. 저 결정했어요!”
“네? 저기……. 결정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늘 자신에게 쓴 소리를 하는 산드라의 흥분한 모습에, 베르나데타는 약간 움찔하면서도 물었다.
“저는 평생 이 나라에서 세라피나 님을 모시겠어요! 그 분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이 나라에 귀족으로 태어난 저의 책무입니다!”
늘 윤기나는 머리에 아름답게 차려입는 산드라지만, 베르나데타는 지금의 그녀야말로 이때까지 중 가장 빛나 보였다.
그리고 베르나데타의 가슴에도, 새로운 생각이…….
* * *
“무슨 짓이야, 산드라!”
갑자기 호통을 치며 들어온 큰 남자…… 오르바의 모습에 다과회의 영애들이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주최자인 세라피나와 장본인인 산드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산드라는 세라피나에게 오르바의 불경을 사과한 뒤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뭔가요, 시끄럽게. 예의가 없군요.”
“뭐냐니……. 당연히 약혼 해소 건에 대한 이야기지!”
오르바가 말한 ‘약혼 해소’ 발언에 다과회에 참석한 영애들이 술렁거렸다.
“아, 겨우 오르바 님께 도착했나요. 저희 부모님과 마켈라이넨 자작 부처께도 제대로 양해를 받았습니다. 이제 당신의 서명만 남았으니, 잘 부탁해요.”
싱긋, 아무런 미련도 없이 단언하는 산드라를 오르바는 믿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보고도 짚이는 점이 아무것도 없나요?”
산드라가 이 얼마나 어수룩한 머리냐며 웃자 오르바는 이를 악물었다.
“아…… 아이니에 대한 얘기라면, 나는 기사로서…….”
“정말로, 어수룩하네요……. 저, 제럴드 님에게 청혼 받았어요.”
“뭐?!”
틸겔 백작 부인의 가든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직 열네 살인 제럴드는 어린 외모에도 진지한 기색을 띠고 산드라에게 청혼해 왔다.
“그 자식……! 형의 약혼자에게 청혼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습 성녀에게 빠져있느라 저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고 해요.”
“큭, 그, 그런 말을 해 봤자 진정한 목적은 우리 가문의 후계자 자리겠지!”
“그렇겠죠.”
자신이 말해놓고도 산드라가 동의하자 의아해하는 오르바를 보며 산드라는 입가를 가리고 미소지었다. 오늘의 부채는 은테에 에메랄드를 장식한 것이다. 제럴드가 준 선물이었다.
“형이 약혼자에게 불성실한 모습을 보고, 그 점을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하셨겠죠. 참으로 총명하세요.”
산드라는 사랑을 동경하는 소녀가 아니다.
입장적으로 반드시 정략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을 각오하고 있고, 상대도 산드라와의 결혼에 이익을 바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제럴드는 산드라에게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 모든 것을 믿지도 않는다.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력도 좋아요.”
열네 살인데도 훌륭한 정치력이다.
자신의 영지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고, 틸겔 백작 부인의 초기작을 손에 넣는 수완도 있다.
“뭐……?! 너는 그걸로 된 거야?! 그런 사랑이 없는 상대…….”
“저와 오르바 님 사이에, 사랑 같은 것은 있었습니까?”
“!”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굳은 오르바를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약혼자로서의 의무도 다하지 않고, 칭찬 하나 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에게 등을 돌리는 등 장래가 불안한 약혼자보다 조건이 좋은 쪽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해요.”
만날 때마다 산드라의 치장을 칭찬하기는커녕 화려하다고 불평하며 수습 성녀를 치켜세운다.
지각은 당연하고 약속은 무시한다. 그걸 탓하면 남자에겐 여러 사정이 있다고 변명한다. 마지막으로 산드라의 말투가 나쁘다고 책임전가한다.
“유행을 만드는 것은 귀족 여성의 의무인데도, 그걸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본인 사정만 말씀하시는 당신에게 저도 정이 떨어졌어요.”
산드라의 본가 알디니가는 복식, 장식품을 많이 취급한다. 귀족 영애가 모이는 이 학원에서 산드라는 중요한 광고탑이며, 마찬가지로 정보 수집에도 종사하고 있다.
오르바가 혐오했던 ‘장식품 얘기만 하는 다과회’가 그것이다.
물론 꾸미는 것은 귀족 영애로서의 소양이며, 산드라는 순수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계속 부정당하는 것에도 인내심의 한계가 있었다.
“마켈라이넨가의 상속에 관해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쪽에서 논의해 주세요.”
산드라와 결혼하는 쪽이 가문을 잇는 것이 아니므로 그건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제럴드는 후계자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산드라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저는 이미 평생 모실 분을 결정했어요. 오르바 님도 평생을 바칠 수 있는 분을 어서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상쾌하기까지 한 기분을 느끼며, 산드라는 찬란한 미소로 힘없이 늘어지는 오르바를 쫓아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젊은 왕과 왕비가 즉위했다.
아름다운 흑발의 왕비에게는 국내 유행을 장악한 우수한 시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녀에게는 그녀를 지지하는 남편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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