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이 아이니와 함께 거리에 나갔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들은 것은, 복도에서의 만남으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단둘이 아니라, 마켈라이넨의 자제분도 함께 하셨었죠?”
“그렇습니다만, 교내라면 몰라도 교외라고요?!”
목소리를 높이는 산드라의 모습에 세라피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마켈라이넨은 오르바의 가문명이다.
“이틀에 한 번 있는 다과회를 취소한 적은 없으니, 그날은 피하시는 거죠. 그 이상 전하께 드릴 말씀은 없답니다.”
“하지만…….”
“그럼 세라피나 님은 의무만 다한다면 전하께서 밖에서 무슨 행동을 하시든 문제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말이 점점 격해지려는 산드라가 아닌, 다른 영애의 질문에 세라피나는 우아하게 손가락을 기울였다.
“내용에 따라 다르죠. 전하는 약혼자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왕이 되기 위한 교육에도 진지하게 임하고 계십니다. 그 이상 그분께 무엇을 요구할까요?”
“그렇다면……. 전하께서 후궁을 들인다고 하셔도 허락하신다는 건가요?”
무심코 코웃음을 칠 것 같아 세라피나는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때와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당신, 왕이 후궁을 맞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 공부하는 게 어떨까요?”
귀족이 정부를 들이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왕의 총애를 받으면 그 일파에도 권력이 가고, 자식이라도 생기면 후사 문제로까지 발전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영애를 일별하고 세라피나는 말을 더했다.
“저와 에릭 전하의 약혼은 전하가 결정하신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귀족의 의무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고등부 학생이에요. 귀족의 의무를 다시 한번 자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세라피나의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절반의 영애들에게는 와닿은 모양으로, 특히 산드라와 베르나데타는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 쓸데없은 발언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귀족의…… 의무…….”
그러나 그것이 전혀 통하지 않은 상대가 있었다는 것을 다음날 깨닫게 되었다.
“세라피나 님, 너무하세요!”
굳이 안뜰 온실 살롱에 나타난 아이니가, 만나자마자 세라피나를 비난했다. 인사도 예의도 없는 행동에 그녀의 후견인의 딸인 베르나데타가 황급히 일어섰다.
“무슨 소리를……. 아이니 씨, 무례해요. 자중하세요!”
평소 목소리가 작고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베르나데타의 강한 어조에 아이니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몸을 바로세웠다.
“무례하다니요? 학원 안에서는 신분이 상관 없다고 들었는걸요!”
흥! 하고 사랑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대꾸하는 아이니는 유독 어려 보였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생각도 말이다.
“신분이 상관 없다니……. 그런 아이 같은 말을…….”
눈이 휘둥그레진 베르나데타를 보고 그녀가 교육한 내용이 아님을 확인하며, 세라피나는 아이니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 무엇이 너무한 거죠?”
참, 하고 아이니가 다시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릭 님과의 약혼은 의무뿐이라고 말했다고 들었어요?! 너무해요.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니, 에릭 님이 불쌍해요!”
어제 말한 내용이 오늘 아이니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 살롱의 참가자 중 누군가가 직접, 내지는 가까운 자를 통해 누설했다는 거겠지. 앉아 있는 영애들의 얼굴을 시선으로 가볍게 쓸던 세라피나의 눈이 아이니에게서 멈췄다.
정확히는, 그 뒤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들에게.
“전부 오셨으니, 잠시 얘기를 나눌까요. ――에릭 전하도 모쪼록 앉아 주시길.”
아이니의 뒤를 따라오던 에릭은 작게 웃고, 오르바와 사우리는 아연한 표정이었다.
* * *
아이니 일행과 세라피나, 그리고 산드라와 베르나데타는 탁자를 둘러싸고, 그 외의 영애들은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들의 귀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옆을 맴돌고 있다.
세라피나의 시중을 드는 시녀가 차를 끓이기를 기다렸다가, 세라피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본디아산 차입니다. 조금 쓴 맛이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우유과 함께 드세요.”
그렇게 말했음에도 아이니는 그대로 마시고 “써.” 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괜찮냐, 아이니.”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네요. 우유도 꿀도 준비되어 있는데, 마치 피해자 같은 얼굴을 하고.”
곧바로 걱정스럽게 말을 건 오르바를 타박하듯 산드라가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바가 자신의 약혼자를 얄미운 듯 노려보았다.
“그렇게 사람을 비난하는 건 품위 없는 행동 아닌가?”
“다과회의 규칙을 알려드리는 것뿐이죠? 차를 마시는 방법도 모르고 맛을 불평하다니, 주최자인 세라피나 님에 대한 모욕이 된다는 사실도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오르바는 훗, 하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는 산드라에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꾸욱 말을 삼켰다. 그것을 곁눈질하며 사우리가 우유와 꿀이 든 작은 병을 아이니에게 내밀었다.
“자, 아이니. 이걸 넣어서 마셔 봐. 맛있으니까.”
“이렇게 쓴데 정말?”
“아이니는 단 것을 좋아한단 말이지.”
왕세자의 약혼자인 세라피나가 내 온 차에 대해 또 불평하듯 말하는 점을 주의시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거겠지. 힐끔힐끔 향하는 베르나데타로부터의 시선에 세라피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정말 사랑스럽네요, 아이니 씨는.”
“아, 저기. 세라피나 님도 예뻐요.”
“뭐어, 후후.”
세라피나가 웃자 사우리는 작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 ‘사랑스럽다’가 칭찬이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이야기는 나누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자리를 마련한 적은 없었지요. 저는 그래도 됐다고 생각했지만 한번 제대로 이야기하는 쪽이 좋았을 것 같네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은 자신인데, 세라피나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라피나 님이 저에게 할 얘기가 있었나요?”
“아니요. 없어요.”
빙긋 웃자 아이니의 고개가 점점 기울어졌다.
그러나 세라피나는 대답하지 않고 아이니에게 물었다.
“우선 아이니 씨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있었죠? 하고 싶은 말이.”
“앗, 그래요. 저기, 세라피나 님은 에릭 님과의 약혼을 의무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사실인가요?”
아이니의 진지한 얼굴에도 세라피나의 미소는 변함이 없다.
“네, 사실입니다.”
“그런, 너무해요! 에릭 님이 불쌍해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머금고 호소하는 아이니. 세라피나는 작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면에 있는 에릭을 보았다.
“그렇다고 하는데, 불쌍하신가요?”
“아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에릭이 부정하자 옆에 있던 아이니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
“무리하지 마세요, 에릭 님! 아무리 왕자님이라도 정략결혼에 의무뿐인 관계라니, 괴로운 게 당연해요!”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아이니의 손이 에릭의 손을 감쌌다.
“귀족이니까 정락결혼은 어쩔 수 없다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세라피나 님에게는 사랑이 너무 없어요!”
“당신……! 적당히 하세요!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 겁니까!”
우당탕탕, 평소에 없는 난폭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산드라가 언성을 높였지만, 아이니는 오히려 그 자세 그대로 대꾸했다.
“눈앞에서 약혼자의 손을 잡고 있는데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차가운 약혼자 쪽이 더 문제 아닐까요?”
늘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니의 눈동자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세라피나의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과연, 지금까지 학원 안에서 에릭 일행에게 달라붙는데도 항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약혼자로서 너무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직접 항의한 산드라에게는 ‘친구’라며 듣지 않았는데.
“후후…….”
무심코 새어나온 웃음소리에 아이니의 눈동자에 욱하고 열이 서렸다.
“뭘 남의 일처럼 웃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질투가 나잖아요!”
아이니의 말은 지금까지 주위가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세라피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잘못 짚은 것이다.
아이니도, 주위도.
“어째서 제가 전하께서 조금 관심을 가졌을 뿐인 털색 독특한 강아지를 질투해야 하죠?”
같은 무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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