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악역 영애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에필로그 어떤 공주의 한숨소리

ykh_t 2025. 4. 26. 02:00

너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싶어.”

최근 서먹서먹했던 약혼자에게 불려 학원 안에서도 사람이 별로 없는 정자에 갔더니 가장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어, 금발의 소녀는 언제나 유지했던 미소를 한순간 잊을 뻔했다.

눈앞의 약혼자는 등 뒤로 핑크 블론드의 소녀를 감싸면서도 이쪽의 모습을 살피고 있다. 한 살 위의 약혼자를,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전부터 우유부단하고 휩쓸리기 쉬운 타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저지를 줄은, 이 솔직한 감상이다.

우선 가장 걸리는 부분을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파기, 인가요.”

그래……. 나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고 말았어. 너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약혼자는 그렇게 말하고 분홍색 머리 소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소녀는 수줍게 이쪽을 살피듯 올려다 보았지만, 그 눈에는 우월감을 감출 수 없다.

죄송해요, 왕녀님……. 저희,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고작 고등부 1학년 주제에 사랑을 논하나.

그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어떤 남작의 사생아라는 것이 판명되어 고등부부터 왕립 학원에 왔다. 이 나라의 1왕녀인 소녀와 동급생이다.

그 출신과 외모가 옛날에 이 학원에 편입해 왔던 성녀와 매우 닮았기 때문에 조금 유명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해소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애초에 이 이야기는 부모님은 알고 계시나요?”

부모님은 관계 없어요!”

있을 거예요. 가문끼리 정한 혼약이니까요.”

그의 가문은 몇 대 전에 왕가의 핏줄이 시집간 공작가다. 나라에서도 유수한 영지를 가지고 있고, 현재 이웃 나라와의 무역도 순조롭기 때문에 명산품의 안정적 공급과 판로의 확실한 확립을 생각해 1왕녀의 약혼자로 선택된 것이다.

그런……. 사랑 없는 결혼을 추진하다니, 왕녀님은 허무하지도 않나요?”

허무할 리 없죠. 왕족의 결혼이에요? 국익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슨 소리냐며 내려다 보는 눈동자는 왕비가 물려 준 신비한 보라색이었다.

그 말에 소녀는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건 그가 불쌍해! 왕녀님은 사랑이 없는 부부의 자식이라 모르시겠지만, 그는 사랑이 있는 결혼을 하고 싶어해요!”

이 학원에는 현 왕의 학창 시절 일화가 몇 가지 남아 있다.

그 중 사랑이 없다고 공언했던 국왕 부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건 국왕과 왕비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 잠깐만!”

덤덤하게 묻는 왕녀를 전 약혼자가 황급히 만류헀다.

사랑이 없는 결혼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역시 국왕 부부에 대한 말을 한 것은 지나쳤다.

미안해. 그녀도 그럴 생각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해. 너도…… 그런 상대를 찾으면 알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도 사랑이 없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가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왕녀를 불쌍히 여기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손은 사랑하는 소녀의 어깨를 맴돌고 있다.

시간낭비야.’

어차피 여기에서 당사자끼리 이야기해도 결정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짧은 시간에 금방 다른 여자에게 향하는 남자는 왕녀로서도 반려로서도 사절이다.

제가 전하께 보고해 두겠습니다만, 그쪽도 제대로 부모님께 보고해 주세요.”

부모에게 억눌려 역시 약혼을 속행하자고 말하지 않도록 못박았더니 두 사람은 얼굴을 빛내며 서로를 보았다. 마음대로 해라.

기뻐하는 소녀를 끌어안으며 전 약혼녀는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하지만 이런 때에도 너는 안색이 바뀌지 않는구나……. 역시 넌 사랑을 모르는구나.”

 

 

 

부정한 연인들이 떠난 정자에서, 왕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럼에도 우아한 몸짓으로 앉았다. 나무들의 웅성거림에 뒤섞여 킥킥거리는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 봐 버렸다, 봐 버렸어.”

엿보다니 무례하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손으로 억누르면서도,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소리 내며 나왔다.

후후. 진실한 사랑, 사랑을 모르는 왕녀님이래. 우후후, 후훗, 아하하하하!”

숙녀는 큰 소리로 웃지 않아.”

아핫, 하지만…… 배가 아파, 으흐흐흐흑.”

당연하다는 듯 왕녀의 옆에 앉으며, 흑발의 소녀는 배와 입을 각각 누르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가 흔들려, 인상적인 헤이즐빛 눈동자가 반사된 빛 탓인지 붉어졌다.

, 눈 색이 불안정해지고 있어.”

아하, 안 돼.”

소녀가 겨우 웃음을 억제하고 심호흡하자 눈동자가 헤이즐색으로 진정되었다.

네가 어둠 마법사라는 사실은 극비 사항이니 조심해.”

네이, 왕녀님. 그건 그렇고, 성녀 행세가 드디어 왕녀님의 약혼자를 유혹했구나. 안목이 없는 약혼자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왕녀와의 약혼을 깨뜨린 며느리가 공작가에서 인정받을 리 없다. 그렇지 않아도 남작가의 사생아로는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폐적일까? 폐적된 도련님과 저 여자가 잘 될까?”

글쎄. 이제 관계 없어졌으니까 아무래도 좋아.”

왕녀는 또 웃음이 터진 듯한 소녀를 감정이 보이지 않는 보랏빛 눈동자로 바라보며 흥미없이 대답했다.

그 여자도 이상해. 자긴 성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학원에 들어가 성녀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고 마음대로 그런 행세를 하다니.”

그렇지. 진짜 성녀의 딸은 여기에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헤이즐 눈동자가 배시시 휘어졌다.

그녀가 성녀의 아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어둠 마법의 사용자임과 동시에 기밀 사항이었다.

1왕녀로서, 동급생으로서 이 기밀 사항을 알게 된 왕녀는 새삼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하지만 지금부터 새 약혼자를 정해야 하는 건 귀찮아.”

왕족의 약혼자는 대개 왕립 학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결정된다.

적장녀인 왕녀에 이르러서는 약혼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졌다.

기껏 이겼는데, 공작가는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

그는 분명 부모님께 보고하고 크게 혼나겠지만, 상관 없다.

다른 나라 왕족을 데릴사위로 삼으면 되지 않아?”

나쁘지 않은 방안이지만, 데릴사위는 필요 없어. 왕위는 동생이 이을 테니까.”

, 그래? 첫째는 왕녀님인데? 메리칸트 여후작이 다음 재상이 된다고 하니, 왕가도 여자가 이어받아도 되지 않아?”

여성이면서 메리칸트 후작가를 이은 재녀는 순조롭게 실적을 남겨, 다음 재상으로 거의 확정이었다.

너 왕궁 안의 일을 너무 잘 아는 거 아냐? 그래도 나는 왕의 그릇이 아니니까 괜찮아.”

반려가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해 줄 수도 있지만, 그 반려 후보가 조금 전에 사라졌다.

그렇구나? 여왕 폐하라고 불러 보고 싶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약혼자 후보를 찾는 데 도움을 줘.”

왕녀님이 직접 찾는 게?”

왕가에서도 선별하겠지만 스스로 조사해도 손해는 없겠지. 경력이나 집안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다른 여자에게 맥을 못 추는 놈을 거를 수 있잖아?”

아아, 진실한 사랑.”

또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폭제가 된 것 같다.

진실한 사랑 말이지. 뭘 보고 진실한 걸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왕녀의 무릎에, 소녀는 버릇없이 머리를 얹고 뒹굴었다.

사랑 없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을 모르는 왕녀님이라서 몰라?”

헤이즐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올려다 본다. 놀리는 듯한 울림도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녀도 알고 묻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거 말인데…….”

왕녀는 자신의 가족을 떠올렸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아이가 있고, 후궁도 정부도 없고, 그럴 기색조차 없고, 공무 이외에도 함께 있고, 그러면서 기념일에는 아직도 선물을 주고받는 부부는 어떨까?”

왕녀의 말에 흑발의 소녀는 이번에야말로 큰 소리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