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악역 영애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수습 성녀 아이니 미콜라의 소원 (中)

ykh_t 2025. 4. 26. 01:49

후작가…… 메리칸트 후작의 저택은 미콜라 남작가보다 두 배는 컸다. 인테리어도 남작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호화로워, 아이니는 부지런히 둘러 보았다.

아이니를 이곳까지 데려온 교회 사람들로부터 후작에게 인도받아, 그로부터 후작가의 가족을 소개받았다.

딸 베르나데타는 두 살 위답게 왕립 학원의 선배기도 해서 학원의 예절 등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은빛 머리에 붉은 빛이 오는 분홍색 눈동자의 미인이지만, 눈을 자주 내리깔고 왠지 마음도 약한 것 같다. 아이니의 이복 언니들은 남작의 딸이라고 으스댔는데 후작가의 딸이어도 심약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아들인 사우리는 후작과 같은 은발에 파란 눈으로,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니의 또래인 모양으로 좀 가치를 매기는 눈으로 자신을 보았지만 아이니가 방긋 웃었더니 얼굴을 붉히고 마주 웃었으니,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후작가에서는 넓고 공주님 같은 방이 주어졌고, 예쁜 옷을 입고 후작가의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밥을 매끼 먹을 수 있었다. 남작가 시절에는 매너를 보기 위해 가정교사 앞에서 혼자 식사하거나 하인들끼리 차례로 밥을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것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었다.

대단해……! 모두 똑같은 것을 먹고 있어! 여기서는 나도 똑같은거야! 그래, 나는 고위 귀족과 동등해진다고 했지. 나는 후작가나 마찬가지야!’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나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고, 싫은 소리를 하는 이복 언니나 계모도 없다.

후작가의 하인들은 모두 아이니를 귀한 손님으로, 아가씨 취급을 해 주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 시간으로 꽉 찬 것도 남작가 시절에 비하면 힘들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작가 시절 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몸가짐정도만 공부하던 것과는 난이도가 달랐다.

잘못해도 매질을 당하지는 않지만 매번 아이니가 막힐 때마다 가정교사가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는 게 싫었다.

마치 내가 아래같잖아…….’

특히 싫었던 것은 베르나데타의 예절 시간이다.

고위 귀족으로서의 예의범절은 다른 교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베르나데타에게는 학원에서 필요한 예의범절을 중심으로 배우지만, 우선 신분이 상관 없는 학원에서 예의범절이 필요한 것이, 아이니는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베르나데타의 수업은 조용하고 재미가 없다.

지금도 귀족 가문이라는 것을 덤덤하게 억양 없이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잠이 온다.

다른 교사과 달리 위압감이 없는 것도 아이니의 긴장감을 희석시켰다.

그리고.

아이니, 공부 끝났어?”

사우리 군!”

이렇게 사우리가 상황을 보러 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이니는 처음에 베르나데타를 깔보듯 바라보는 사우리가 조금 불편했다.

같은 후작가의 자식인데 왜 상하를 만들려고 하는 건지. 남매니 사이좋게 지내면 될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하인들의 소문으로부터 후작 부인이 후처이고 베르나데타와 사우리는 이복 남매임을 알게 되었다. 분명 가문을 잇기 위한 싸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우리는 아이니를 소중하게 대해 준다.

상처 투성이인 손을 멋진 손이라며 좋은 냄새가 나는 핸드크림과 분홍색 매니큐어를 줬다.

그리고 이렇게 재미 없는 베르나데타의 수업 시간에 나타나 아이니의 편을 들어 준다.

누님, 그런 주입식 학습으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맞아요. 이렇게 이름이 비슷한 귀족들은 종이를 보는 것만으로는 기억할 수 없어요.”

사우리가 엄호해 주는 것에 가세하여 아이니도 베르나데타의 수업이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 아이니는 어머니와 달리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원 안에 재적하고 계신 분들의 가문을 적어 두었으니,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

베르나데타의 담담한 대답에 무심코 으악소리를 낼 뻔했다.

벨 씨는 전부 기억하고 있나요?”

.”

베르나데타가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대답하자 절망할 것 같았지만, 사우리가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누님은 초등부부터 서서히 익혔잖아요. 아이니에게 이 기간 동안 다 외우라고 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렇긴 하지만, 한 달이나 있는데 외울 수 없나요?”

마치 당연하다는 일처럼 말해 다시 종이에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긴 이름과 설명이 빼곡히 적힌 것이 수십 장이나 있어 진절머리가 났다.

저는 지난 시험에도 학년 상위였지만 누님은 학원 성적도 딱히 좋지 않잖아요. 본인이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 마세요.”

, 그래요? 벨 씨는 성적이 좋은 줄 알았어요.”

베르나데타는 귀족 자녀로서의 예의범절도 완벽하고, 감정적이지도 않고 말투도 현명해서 틀림없이 머리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사우리가 왔다면 이 지루한 수업을 벗어날 기회다. 예의범절에는 제대로 된 교사가 붙어 있으니 베르나데타의 수업은 조금이라면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한 아이니는 왕도에 온 후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런 종이 위에서만 봐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요. 저기, 밖에 나가서 실제로 공부해요! 이쪽에 온 후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는걸요.”

학원을 졸업하면 성녀로서 매우 바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야말로 하인 때처럼 쉬는 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네, 그거. 아이니는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쪽이 기억에 남는 타입인 것 같고.”

사우리가 동의해 주었기 때문에 아이니는 완전히 그럴 마음으로 일어섰지만, 그것에 베르나데타가 눈가를 찡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기초도 되어 있지 않은데, 밖에 나가서 뭘 얻는다는 건가요……?”

그거. 누님은 잘도 그렇게 남을 깔보는 눈을 합니다. 머리도 안 좋은데 그런 건 어떨까 싶네요, 정말.”

베르나데타를 대하는 사우리의 태도가 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니도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베르나데타는 차분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심약해 보이는 여성이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맞아, 윗사람처럼……. ‘동등한 상대에게 쓰는 말투가 아니야.’

그래서 아무래도 베르나데타를 좋아할 수 없는 거라고, 아이니는 납득했다.

그래도 자신은 성녀가 될 테니 고위 귀족의 딸인 베르나데타와는 동등한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보여야겠다고 베르나데타에게 배운 예를 해 보였지만, 더욱 얕보였다.

화가 난 사우리는 아이니를 데리고 거리로 나갔고, 그 이후로도 사우리의 옆에 있으면 베르나데타의 지루한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아이니는 그렇게 했다.

 

 

그러는 사이, 왕립 학원에 편입할 날이 찾아 왔다.

어떻게든 고등부 전까지의 학습은 마쳤고, 예의범절의 교사로부터도 합격점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사우리도 같은 학년이고 아무런 불안도 없었다.

실제로 편입한 반 친구들도 아이니에게 친절했고, 아무도 아이니를 밑으로 보거나 과도하게 치켜세우지도 않았다. 똑같았다.

그것에 기분이 좋아졌던 아이니는 사우리가 교내를 안내해 주던 때 발견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위치가 다른 자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사우리와 교내를 걷던 중 왠지 모르게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이 있음을 느꼈다. 보니 낯익은 푸른빛 도는 은발이 그 중심에 있었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보니, 금발의 예쁜 남성과 적발의 늠름한 남성, 그리고 검은 머리의 예쁜 여성이 있었다. 꽤 화려한 면면으로, 그 안에 베르나데타가 있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며 옆에 있던 사우리에게 물었다.

사우리 군, 벨 씨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누구야?”

이 나라의 1왕자이자 왕세자이신 에릭 할바리 전하와 그 약혼자이신 세라피나 퍼시발타 후작 영애, 그리고 3학년인 오르바 마켈라이넨 자작 영식이야.”

, 왕자님?! 저게……. 벨 씨와 친한가?”

왕자가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고, 정말로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 강했다. 심지어 왕자와 베르나데타가 함께 있다니.

그래. 전하의 약혼자이신 퍼시발타 양과 사이가 좋은 모양이니까…….”

검은 머리의 날씬하고 품위있는 미인이 왕자의 약혼자라는 모양이다.

있지, 우리도 인사하러 가자!”

모처럼 신분에 관계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학원에서 왕자님을 만난 것이다. 가지 않으면 손해였다.

잠깐.”

사우리가 놀라는 사이 아이니는 종종걸음으로 무리의 중심으로 향했다.

벨 씨!”

아이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베르나데타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고 그런 얼굴도 하는구나 생각하며 다가갔다.

벨 씨가 보여서 왔어요! 저기, 그쪽은 왕자님과 약혼자분인 거죠?”

소개해달라는 태도를 숨기지 못하고, 아이니는 힐끔힐끔 왕세자 쪽을 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금빛 곱슬머리에 바다와 하늘이 섞인 듯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림 같은 왕자님이었다.

이런 진짜 왕자님과 얘기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

호위라던 체격이 좋은 남학생이 앞으로 나섰지만, 이름을 대었더니 납득하고 물러나 주었다. 역시 성녀는 동등하구나 싶어서 기뻐졌다.

방긋 웃자 이 선배도 아이니에게 호의적인 태도가 되었다.

모르는 것도 많아서 폐를 끼칠지도 모르지만, 잘 부탁드려요.”

약혼자인 사람은 미소짓고 있고, 베르나데타는 그 불가해한 것을 보는 얼굴이 되어 있었지만, 왕자님은 상냥하게 그래, 열심히 해.” 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날 돌아오는 마차에서 사우리가 왕족에게는 먼저 말을 걸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왕족이라고 해서 모두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학원의 방침에도 어긋나고, 무엇보다도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모처럼의 학교 생활도 외톨이라니, 왕자님이 불쌍해. 나는 그렇게 굴지 말자.’

아이니는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음날부터 왕자의 호위인 오르바와 에릭 왕세자와 교류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