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악역 영애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작 영식 제럴드 마켈라이넨의 결심 (終)

ykh_t 2025. 4. 24. 03:23

고등부에 진학한 오르바는 여전히 기사 일변도였지만 기사로서의 역량은 있었던 듯, 한 살 어린 왕세자의 학원 안 호위로 지명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인도 수업이 있으니 수습 호위로서 쉬는 시간 등을 함께 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형도 아버지도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제럴드는 내심 산드라의 부담이 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수준이 아닌 일이 벌어졌다.

 

오르바가 3학년, 산드라가 2학년, 제럴드는 중등부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왕립 학원이, 아니 귀족계가 떠들썩해졌다.

성녀가 나타난 것이다.

정확히는, ‘수습성녀.

성녀는 빛 마법에 눈을 뜬 여성을 말한다.

이 나라에서 마법이라고 하면 기적에 가까우며,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빛 마법은 정화진정의 힘이 있다. 이 나라에서 두려워하는, ‘주술이라고 불리는 어둠 마법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귀중한 능력이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었다.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성녀의 출현에 교회 관계자들은 열광했다.

그러던 중 재상인 메리칸트 후작가가 후견인으로 나서, 시골 남작가의 사생아였던 수습 성녀의 교육을 맡았다고 한다.

친교회파이긴 하지만 나라 정치의 중추를 담당하는 메리칸트가 덕분에 우선 성녀의 존재는 사교계의 분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성녀는 교회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회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교계에서 다툼의 근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교육을 마친 성녀가 학원에 편입하며,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오르바는 제럴드보다 네 살이나 큰 형이며 후계자다.

제럴드는 오르바를 지지하는 입장인 데다가 지금은 아직 중등부의 학생이라 고등부의 일에 참견할 권리는 없다. 그래도 참을 수 없던 제럴드는 형이 귀가하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또 산드라 님과의 약속을 어겼다면서요.”

돌아오자마자 동생에게 핀잔을 들어, 오르바의 눈썹이 한껏 언짢게 찡그려졌다.

뭐야, 갑자기. 너와는 상관 없잖아.”

있습니다. 형님이 바람맞힌 산드라 님에게 사과하고 벌충한 건 저예요.”

몇 번이나 있던 일이지만, 요즘 특히 많아졌다.

“너한테 안 시켰잖아. 그냥 놔 둬.”

그럴 수도 없어요! 산드라 님과의 약혼은 마켈라이넨가의 일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지만, 이번에도 오르바는 귀찮은 듯 하인에게 짐을 떠넘기고 가 버렸다. 제럴드는 중등부 학생이 되어 키도 자라고 발작도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네 살 위의 형에게 있어서는 변함없이 허약한 동생이라, 그런 동생의 말 따위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고등부에 들어가며 산드라는 점점 아름다움을 연마했으며, 볼 때마다 새로운 장식품을 걸치고 그 모습을 빛내고 있었다.

제럴드는 이 가슴에 있는 것은, 형의 약혼자에게 품기에 적합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서도 산드라는 차기 자작이 될 오르바와 이어지는 편이 좋다.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도 몸소 알고 있다.

 

 

* * *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켈라이넨가에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정부를 밖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판명된 것이다.

평화롭던 마켈라이넨가의 저택 안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버지가 아끼던 모형은 어머니에 의해 산산조각났다.

지금까지 직정적이고 무신경한 부분은 있었지만, 성실한 분이라고 생각해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만…… 실수였습니다. ……더러워.”

지금까지 줄곧 아버지의 뒤에서 잔잔하게 웃던 어머니의 귀신 같은 형상을, 제럴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이혼까지 갈 위기였지만 아버지가 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성심성의껏 어머니에게 사과한 일로 부부는 어떻게든 회복한 모양이다.

온화하고 겸손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새로운 면모를 봤음에도 제럴드는 이것을 호기로 생각했다.

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말하면 그만이다. 제럴드는 가족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은 요즘 수습 성녀하고만 함께 계시는 것 같네요.”

“! ……!”

오르바가 황급히 막으려고 입에 든 것을 삼키려 했지만 늦었다. 한 입 가득 넣는 순간을 노렸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어머……. 그러니?”

어머니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지만 오르바는 아직도 목에 걸린 고기와 씨름하고 있어, 제럴드가 그 대신 대답했다.

. 점심도 차도 매일 함께 한다고 들었어요. 중등부에까지 소문이 돌았으니, 이미 상당한 사람이 목격한 사실이겠죠.”

겨우 고기를 다 삼킨 오르바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노려봤지만,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정말이냐, 오르바.”

점심도 차도 전하와 함께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들러리예요!”

아버지의 질문에 오르바가 황급히 대답하자, 제럴드는 다른 쪽을 추격했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을 때에도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고 들었는데요.”

다시 한 번 눈총을 받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오르바. 상대는 수습 성녀인 데다가 당신은 약혼자가 있는 몸이에요. 다른 여학생과 너무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됩니다.”

찌릿 시선을 받은 아버지가 조용히 와인을 들이켰다.

그녀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르바는 그렇게 말했지만, 제럴드는 오르바가 수습 성녀에게 주의를 주는 산드라를 비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확실히 우리는 왕실파니까 교회 사람들과 너무 친해지면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전하가 함께라면 뭐, 적당히 해 둬라.”

아버지의 그 가벼운 주의를 오르바가 생각할 리도 없고, 오히려 전하를 말려야 할 입장인데도 전하도 함께라면 상관 없겠다며 우쭐해졌다.

고등부의 모습은 좀처럼 알 수 없지만, 제럴드의 귀에는 이후에도 오르바가 산드라를 험악하게 대하고 수습 성녀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제럴드는 그때마다 산드라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생각했지만, 동시에 어쩌면 산드라도 조만간 오르바에게 정이 떨어져 약혼을 파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차남에 몸도 약하니 후계 자리를 다툴 싹은 없지만, 반드시 장자가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규칙 또한 없다.

그런 희미한 기대를 품은 제럴드를 무너뜨린 것도, 산드라였다.

 

어머, 제럴드 님. 오랜만이네요.”

중등부와 고등부 교사의 경계선에 있는 안뜰에서 우연히 산드라와 만났다. 사실은 혹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이 길을 지나가는 것을 일과로 삼았기 때문에 필연일지도 모른다.

산드라 님, 오랜만입니다. 멋진 머리 장식이네요. 그 장식은 페리도트인가요?”

오늘의 산드라는 머리를 둘로 나누어 묶어, 그 양쪽에서 작은 머리 장식이 빛나고 있었다.

맞아요. 갈릴레이의 신작인데 멋있지요?”

그 갈릴레이의! 판로가 한정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알디니가에서?”

네에. 협상은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해냈어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미는 산드라의 모습에 제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산드라 님이 교섭을……?”

갈릴레이라고 하면 지금 왕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보석 장식 장인이다. 신예지만 까다로워 일부 업자하고만 연락을 주고받기로 유명한데.

오라버니의 덤이지만, 저도 이야기했어요. 처음에는 상대해 주지 않았지만 갈릴레이 씨의 장식이 어떤 드레스에 어울리는지를 설명해 드렸더니 귀를 기울여 주셨답니다.”

대단해…….”

산드라는 제럴드의 진심어린 감탄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말했다.

우후후, 스스로 움직여서 손에 넣은 물건은 또 각별해요.”

“!”

산드라는 이후 다과회에서 이 머리 장식을 선전하겠다며 훌쩍 떠났다. 그 뒷모습은 약혼자에게 험악하게 굴며 탄식하는 영애 따위가 아니었다.

 

? 제럴드잖아!”

? , 혹시 오르바 씨의 동생인가요?”

산드라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오르바가 핑크 블론드의 영애와 함께 나타났다. 같은 고등부라 이쪽과 만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 동생인 제럴드다. 제럴드, 이쪽이 수습 성녀인 아이니 미콜라 남작 영애.”

처음 뵙겠습니다! 사이좋게 지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르바 씨와는 별로 안 닮았네요.”

생글생글 친한 척하며…… 무례하게 손을 내밀어 오는 수습 성녀, 아이니를 지금 처음 보았다. 제럴드는 방긋 웃으며 거리를 둔 채 목례했다.

뭐야. 형님이 귀엽다 귀엽다 노래를 불러서 얼마나 귀여운가 했더니…… 산드라 님이 백 배 더 귀엽잖아.’

정말이지, 더럽게 고지식한 동생이야.”

내민 손을 잡지 않았더니 당황하는 아이니에게 오르바가 대신 말해 주었다. 그런 배려를 할 수 있다면 산드라에게도 더 신경을 쓰라고 무의식적으로 산드라가 떠난 쪽을 보자, 그것을 눈치챈 아이니와 오르바도 그쪽을 향했다.

, 산드라 님?”

, 또 뭐 장식품 얘기나 하는 다과회라고 하는 거겠지.”

시시한 듯 말하는 형은, 아직 집안 사업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은 애송이다.

큰 계약을 따내는 서포트를 하고, 그 선전에도 나선 산드라를 비난할 수 있는 요소가 어디에 있을까.

산드라는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건가 싶었던 제럴드의 뇌리에 조금 전 산드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스로 움직여서 손에 넣은 물건은 또 각별해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형도 수습 성녀도 돌아보지 않고, 제럴드는 달리기 시작했다.

맞아. 뭘 착각하고 있던 거야. 우습게 보고 있었어.’

산드라 알디니는 기다리기만 해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스스로 움직여야 해……!’

 

그리고 제럴드의 행동은 빨랐다.

산드라가 좋아할 만한 장식품을 찾아 일정을 조사했다.

오르바가 여전히 수습 성녀에게 붙어 다니는 것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자신이 산드라를 흠모하고 영주 공부도 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머니를 포섭하는 것이 빠르기도 하고, 얼마 전 정부 소동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불성실한 남자에 대한 혐오가 강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후계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지만, 오르바가 아직도 수습 성녀에게 빠져 있느라 산드라를 소홀히 하는 것에는 분노했다. 어머니가 산드라를 좋게 보는 것도 효과가 있었다.

판단은 산드라 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산드라 님이 저를 거부하신다면 포기할게요. 그러니 어머니, 제게 기회를 주세요.”

 

 

* * *

 

 

그리고 제럴드에게는 형편 좋게도 오르바가 또 산드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제럴드에게 대리를 떠넘겼다.

틸겔 백작 부인의 가든 파티…… 입니까?”

그래. 재미 없는 여자들만의 파티야. 산드라가 초대를 받았으니 혼자 가면 되는데 나를 동반하라고 한 거야. 네가 대신 가라.”

틸겔 백작 부인이라면 액세서리 브랜드로 영향력이 있는 분이잖아……. , 저번에 갈릴레이와의 거래에 성공했으니까……?’

틸겔 백작 부인의 파티라니, 복식이나 장식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가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모임이다. 광산을 가진 마켈라이넨가로서도 참가해서 손해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산드라 님은 형님에게도 권유한 거겠지…….’

그걸 다른 여자와 나간다고 바람 맞히는 건가, 이 남자는.

. 시끄러우니까 산드라에게는 당일까지 말하지 마. 전하의 시중도 들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데 시끄럽다고, 그 녀석.”

학원 밖이라면 제대로 된 호위가 있을 텐데. 요컨대 전하와 수습 성녀를 단둘이 두고 싶지 않은 것뿐이잖아.’

하지만 제럴드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순조롭게 되고 있다.

여기에서 산드라가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해 자신을 팔아넘길 기회다.

. 알았어, 형님. 내게 맡겨 줘.”

산드라 님은, 내가 행복하게 해 드릴 테니까.

 

 

그 이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틸겔 브랜드의 초기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산드라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에메랄드 브로치가 두 개.

산드라와 제럴드의 몫이다.

이거라면 산드라도 함께 착용해 줄 것이다.

 

당일 마중하러 나가자 산드라는 놀랐지만, 또냐고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로 산드라는 오르바를 기대하지 않는다. 술렁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우선은 선물을 건네고, 가든 파티에서 훌륭한 파트너가 되는 일에 집중했다.

 

 

훌륭했어요, 제럴드 님!”

돌아오는 마차에서 산드라는 붉어진 뺨으로 만면에 미소지었다.

틸겔 백작 부인도 이 브로치에 감동해 주셨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잔뜩 할 수 있었어요.”

아뇨. 저야말로 마켈라이넨이 가진 광석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산드라 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파티는 시종일관 잘 진행되었다.

틸겔 백작 부인은 산드라도 제럴드도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임시 파트너임을 밝혔더니 다음에는 제럴드에게도 초대장을 보내겠다고 말해 주었다.

마켈라이넨가의 광산은 작지만 질 좋은 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전개를 기대할 수 있다.

오르바 님은 이렇게는 못 하시니까요.”

흥분한 산드라에게서 오르바의 이름이 나와, 제럴드는 등을 바로세웠다.

산드라 님……!”

결심한 목소리에 산드라도 지금까지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하던 말을 멈추어 제럴드를 보았다.

파티 후에 시간을 내어 달라고 했었는데요…….”

네에. 물론이죠. 약속했고, 파티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는걸요. 얼마든지.”

그럴 의도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14살인 제럴드의 가슴 고동이 빨라진다. 얼굴에 모이는 열을 누르며,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한 듯한 마차에서 내려 산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부에게는 돌아가라고 부탁했습니다. 여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리는 산드라를 에스코트한다.

 

어머…….”

나지막한 언덕에서, 햇빛을 받으며 에메랄드 그린색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이 브로치와 같은, 산드라 님의…… 빛나는 눈동자의 색입니다.”

멋져……. 오라버니를 따라 항구에 가 봤지만, 이렇게 넓게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산드라의 얼굴을 보고, 제럴드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무릎 꿇었다.

산드라 님……. 당신은 보석보다도, 바다보다도, 태양보다도 빛나는 여성입니다. 부디 그 빛에 구혼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산드라는 먼저 눈을 크게 뜨고, 한 번 입술을 물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은…… 오르바 님으로부터 가독을 빼앗는다는 이야기인가요?”

냉정하고 이지적인, 사업가 여성의 눈이다.

그래야 제럴드의 태양이다.

아니……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지금의 형님에게 마켈라이넨가를 맡길 수는 없으니, 장래에는 제가 가문을 잇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든 되지 않든, 저는 산드라 님의 옆에 있고 싶어요.”

어머…….”

거기에서 처음으로, 산드라가 살짝 볼을 붉혔다.

……저처럼 지독한 여자는 부모가 정해 준 상대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산드라 님은 언제나 공평하게 고상하실 뿐입니다. 누군가요, 그런 말을 한 것은.”

저희 오라버니와 당신의 형이에요.”

나중에 무릎 꿇게 하죠.”

어머, 우후후.”

제럴드가 성인이 된 산드라의 오빠에게도, 오르바에게도 당할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즉답하는 제럴드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렀다.

잠시 웃은 뒤, 산드라가 문득 말했다.

조금……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지금 여기에서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는데, 유예를 받은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아직 산드라는 오르바가 수습 성녀와 거리에 나갔다는 사실을 모른다. 산드라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은 부아가 치밀지만,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알리면 제럴드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내일 이후, 또 사태는 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제럴드는 오늘은 산드라와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일에만 종사했다.

 

 

* * *

 

 

과연 제럴드의 뜻대로 오르바와 수습 성녀(와 전하)의 외출을 알게 된 산드라는 크게 화를 냈고, 거기에 성녀와 차기 왕비인 세라피나의 대결이라는 소동까지 벌어져 며칠간 중등부까지 떠들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오르바의 부재를 짐작하고 산드라와 산드라의 아버지인 알디니 자작이 마켈라이넨가에 방문했다.

오랜만입니다, 마켈라이넨 자작, 자작 부인. 연락도 없이 실례합니다.”

아뇨, 아뇨. 이쪽이야말로, 일부러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두 자작과 마켈라이넨 자작 부인, 그리고 산드라와 제럴드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쪽의 서류를 보시고 괜찮으시다면 서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디니 자작이 내민 것은 오르바와 산드라의 약혼 해소 신청 서류다.

마켈라이넨 자작과 제럴드가 동시에, 그리고 정반대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건…… 하지만…….”

아니, 저도 약혼은 집안끼리의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만, 이 아이들도 성인이 되기 전인 고등부생이잖습니까? 나름대로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하지만, 그럼 마켈라이넨과의 거래는…….”

, 그건 문제 없습니다. 그렇지, 제럴드 군.”

산드라와 닮은 에메랄드 그린의 시선을 받아, 제럴드는 들뜬 자신을 억누르며 !” 라고 대답했다. 미처 숨기지 못한 기쁨에 산드라가 쿡쿡 웃는다.

제럴드, 너 설마…….”

제럴드, 성취했군요!”

부모님이 동시에 말하는 것에 제럴드는 웃는 얼굴로 양쪽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럴드 군이 산드라를 좋아해 주고 있으니 마켈라이넨가와의 거래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가독에 대해서 저희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그쪽에서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럴드 군에게 물려 주어도 좋고, 오르바에게 산드라만큼 지혜롭고 사교 모임에 능한 아내를 찾아 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건……. 하지만 오르바는 장남이고, 지금까지 적자로 키웠으니까 갑자기는……. 우리 오르바가 뭔가 실수를 했다면 모를까…….”

여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작 부인이 남편의 팔을 잡고 말렸다.

저는 전부 들었어요. 불성실한 남자에게 산드라 양은 아깝습니다.”

어머니를 먼저 아군으로 만들어 두어서 다행이라고, 제럴드는 새삼 생각했다.

 

 

 

이렇게 오르바와 산드라의 약혼은 끝나고 제럴드와 산드라의 약혼이 다시 성사되었다.

오르바가 투덜투덜 불평해 왔지만 제럴드는 첫사랑의 결실이 맺어 들리지도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좋아하는 수습 성녀와 끈적거릴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애초에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감사해도 될 정도다.

산드라가 냉정한 눈으로, 제럴드를 정략 결혼 상대로 선택해 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저는 세라피나 님을 모실 생각이라 제럴드 님의 후계 다툼에는 가세할 수 없어요.”

그 말을 듣고도 섬길 분을 정해 더욱 빛나는 산드라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문제 없습니다. 마켈라이넨가를 위해 뭘 해야 할지는 마켈라이넨가에서 상담합니다. 저는 산드라 님의 곧은 마음씨를 원하니까요. 당신의 꿈을 지탱하고 싶습니다.”

후후, 제럴드 님은 말을 잘하시네요. 중등부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산드라는 제럴드의 말을 반 정도밖에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것도 느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산드라의 옆에 평생 붙어 있을 권리를 얻은 것이다.

평생을 걸고, 산드라에게 마음을 계속 전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