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악역 영애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작 영식 제럴드 마켈라이넨의 결심 (前)

ykh_t 2025. 4. 24. 03:15

넌 정말 연약하구나.”

이렇게 몸이 약해서는, 장래가 걱정이야.”

마켈라이넨 가문은 모두 튼튼할 텐데.”

제럴드 마켈라이넨은 선천적으로 호흡기관이 약했다. 운동을 하면 금방 숨이 가빠지고, 몸도 작고 허약했다.

그것뿐이라면 점점 성장하며 건강해질 테니 신경 쓸 일이 아니었겠지만, 제럴드의 가문인 마켈라이넨 자작가는 영지가 있는 귀족으로서는 드물게 기사를 많이 배출하는 가문이었다.

마켈라이넨 가문의 남자들은 대부분 체구가 크고 힘도 셌기 때문에 제럴드의 존재는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걱정했고, 아버지는 마켈라이넨 가문에 허약 체질은 없다며 자신의 탓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친척도 모두 건강했기 때문에 대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네 살 터울인 형 오르바와 비교받았다.

오르바는 마켈라이넨가의 남자를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같은 세대 귀족 중에서도 월등이 체격이 좋고 힘이 강하며, 어려서부터 검에 관심이 많았다.

그만큼 아버지처럼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탓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할까,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할까, 무신경했다.

이런 것도 못하는 거냐.”

왜 그렇게 뛰냐. 걷는 게 더 빠르겠다.”

언제까지나 자라질 않는군.”

넌 정말 연약하구나.”

네 살이라는 터울도 있어서 오르바와 어울릴 일은 없고, 항상 제럴드는 오르바의 아래였다.

어쩔 수 없어……. 형님은 크고 강하니까……. 내가 건강해져도 형님에게 힘으로 당해낼 수는 없겠지.’

제럴드가 초등부에 들어갈 무렵에는 발작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부터 형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제럴드가 초등부에 들어감과 동시에 형 오르바가 약혼을 했다.

상대는 같은 자작가인 알디니가의 장녀인 산드라라는 소녀였다. 나이는 오르바보다 한 살 아래, 제럴드보다 세 살 위인 열두 살이니, 아직 제럴드와 같은 초등부에 있을 것이다.

무척 똑똑하고 귀여운 아가씨랍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오르바는 얼굴을 찡그렸다.

얼굴은 귀여울지도 모르겠지만 기가 세고 거만한 여자였어.”

핫핫, 알디니 가문은 신흥 자작가고 장삿속이 강하니까. 상인 기질이겠지.”

아버지는 이상하게 웃었다.

알디니가라면 들은 적 있어……. 분명 복식 등을 중심으로 폭넓게 장사를 하고 있는 가문이야.’

과연, 역사만 오래되어 영지를 가졌지만 간신히 살고 있는 마켈라이넨가가 혼약을 맺기에는 안성맞춤인 가문이다.

나이도 어린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건방진 여자입니다!”

하하하, 그런 여성의 고삐를 잡아야 훌륭한 남자가 되는 거다.”

호쾌하게 웃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미소지었다. 이것이 마켈라이넨가다.

 

 

형님의 약혼자라…….’

미래에 마켈라이넨가의 안주인이 되어, 자신의 형수가 될 여성이다. 언젠가 만나게 될 형수를 떠올리며, 제럴드는 가능하면 형님같은 무투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곧 찾아왔다.

학원이 쉬는 날, 제럴드가 집에서 천천히 책을 읽고 있던 와중 현관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확인하러 가니 어머니가 황급히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 산드라 양, 일부러 와 주시다니!”

산드라……. 형님의 약혼자야.’

그런데 왜 집에?

아뇨, 약속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셔서, 몸이라도 안 좋으신 건지 여쭈러 왔답니다.”

누가 오르바를 좀 불러 주렴.”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지시했지만 모두 난처한 얼굴을 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다.

형님이라면 오늘 일찍 기사단 훈련을 견학하러 간다고 나가셨어요.”

아침 일찍 서두르며 나가던 형에 대해 보고하자, 눈을 크게 뜬 어머니의 뒤에서 금발에 에메랄드처럼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이니?”

하인을 돌아보며 어색한 대답을 듣고는 마켈라이넨 부인은 세상에…….’ 라고 머리를 감싼 후 산드라에게 향했다.

미안해요, 산드라 양. 오르바는 나중에 따끔하게 말해 둘 테니, 괜찮다면 저와 다과회라도 할래요?”

아뇨, 부인도 바쁘실 테지요. 그렇다면…… 저기, 동생분이 상대해 주셨으면 해요.”

눈꼬리가 올라간 커다란 눈망울이 다시 제럴드를 사로잡았다.

언젠가 가족이 될 거잖아요. 교류를 다져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 제럴드, 상대할 수 있지요?”

!”

제럴드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확실하게 대답했다.

 

산드라는 금색의 말아올린 머리에, 흰색 바탕에 빨간색 꽃무늬 자수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들어 보니 오늘은 오르바와 근처에 있는 언덕에 피크닉 데이트를 나갈 예정이었던 것 같다.

형님 일은 죄송합니다.”

제럴드가 사과했지만, 산드라는 새침하게 그 사과를 털어냈다.

사과는 당신의 형님으로부터 직접 받을 테니 괜찮아요. 그것보다 모처럼의 기회인걸요. 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눠요.”

조금 전 마켈라이넨 부인에게도 그랬지만,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제럴드가 아는 귀족 여성이란 어머니처럼 남편을 앞세워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산드라는 제럴드에 대한 정보는 알고는 있었던 것 같고, 초등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형의 약혼자라기보다는 학원 선배와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남자에 이 집안 사람인 제럴드가 화제를 이끌어야했지만 산드라는 말을 잘했다.

초등부 행사나 교사 이야기 등 제럴드가 알고 흥미도 있을 이야기를 해 주고, 형에 대한 어설픈 사과였을 다과회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어머, 그 책은…….”

그런 와중 산드라는 제럴드가 읽던 책에 눈길을 주고 화제를 돌려 주었다.

, . 광석 책이에요.”

마켈라이넨가가 광산을 가지고 있으니까 읽으시는 건가요?”

아뇨, 그것도 있습니다만, 읽다보니 순수하게 즐거워져서요.”

계기는 영지에 광산이 있으니 공부해 두려는 생각이었지만, 일고 있는 사이에 점점 광석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맞아요. 아무튼 지식을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산드라의 말에 제럴드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빈약해서 기사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자 산드라는 이상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안 좋으세요?”

, 어렸을 때는 폐가 약해서……. 이제 거의 나았지만, 여전히 빈약해서…….”

자신의 가느다란 팔이 부끄러워져 소매를 잡아당기며 아래로 내리는 제럴드를, 산드라는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보았다.

별로 빈약하게 보이지는 않는데요……. 흰색이나 연한 색의 양복이 빛날 것 같아요. 게다가 이제 막 초등부에 들어가셨잖아요. 성장기는 이제부터 아닌가요.”

하지만 형님은 저 정도의 나이에 벌써…….”

점점 움츠러드는 제럴드의 귀에 산드라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싫다. 형제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인데, 똑같이 생각하면 어떡해요?”

…….”

제럴드 님은 오르바 님과는 다르니 성장 속도도 다를 테고, 잘하는 것도 다를 테지요?”

아버지도 친척도 마켈라이넨가의 남자는 기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이외는 실패인 것처럼 말해 왔다..

무엇이 장점인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어요. 그런 다음 자신의 책무에 힘쓰면 되니까, 제럴드 님도 기사 외의 길을 생각해 보시면 어때요?”

산드라가 보기엔 모처럼 훌륭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데도 마켈라이넨가의 남자가 굳이 한번 기사를 경유하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특히 자신의 약혼자인 오르바도 기사도 일직선인 것이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 난감했다.

그러니 기사가 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고 책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그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늘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아버지에게 한숨을 들으며 형에게 업신여겨졌던 소년은, 마음속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 언젠가 형님과 산드라 님이 영지를 물려받았을 때, 꼭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5년 후, 형과 수습 성녀가 만나기 전까지는.